향유

4월 끝자락의 갑작스런 연휴의 갑작스런 여행 (나홀로 대구-부산여행 : 대구편1)

여자 사람 2015. 5. 1.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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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4.30 저녁

따란- !
동대구역에 도착했다. 4시 40분차를 타서 7시 5분에 도착했으니 두시간 반쯤 걸린 것 같더라. 일단 도착해서 네이버 지도를 실행했다. 짐이 너무 무거웠기에, 게스트하우스에 가방부터 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동대구역 건너편 정류장에 버스를 타러갔는데 버스가 눈앞에서 태워주지도 않고 지나쳐 가버렸다. 원래 대구는 적극적으로 어필하지 않으면 버스를 안 세워주나 싶었다. (그리고 후에 알게된거지만, 이 지나친 버스마저 모두 나름의 맞물리는 이유가 있었다는 것.)

여차저차 다른 버스를 타고 게스트하우스를 찾아갔다. 가는 길엔, 역시나, 길을 좀 헤맸다. 많이 헤매진 않았다. 다행이었다. 게스트하우스를 찾아가는 골목은 꽤나 스산했는데 왜 대구를 고담씨티라고 하는지 느낌이 바로왔다. 비만오면 추격자에서 본 듯 한, 뒤에서 살해당하기 딱 좋은 길이었다.

내가 예약한 게스트하우스는 더스타일게스트하우스였는데, 단정하고, 조용하고, 깨끗했다. 침구도 푹신하고 침대마다 각자 커튼도 쳐있어서 짧은 시간이지만 편하게 잘잤다. 목요일이라 그런지 방에 사람이 거의 없었다. 4인실, 2인실도 다 텅텅 빈거 같더라. 샤워실 안 밀려서 좋았다.

ANW, 저녁을 못 먹어서 부랴부랴 밥을 먹으러 동성로로 나갔다. 체인점 음식은 먹고싶지 않아서 즉흥적으로 뭐 유명한 떡볶이집으로 찾아갔는데 닫혀있었다. 그냥 가는 길에 본 문 연 떡볶이 집으로 갔다. (뒤늦게 찾아보니 이 집은 떡볶이 전문점이 아니라 양념오뎅 전문점이었다. 어쩐지 오뎅이 맛있더라. '대박! 양념오뎅'이라는 집이다.) 납작만두와 양념오뎅, 순대, 떡볶이를 먹었다. 시킬 때는 너무 많이 시키나 싶었는데 생각보다 양이 많지 않아서 금세 싹 비웠다. 와구와구.



양념오뎅은 정말 맛있었고 떡볶이는 후추맛이 강했다. 납작만두는 별맛 없지만 고소하고 쫀득, 떡볶이 양념이랑 잘 어울리더라. 순대는 대구답게 막장이 함께 나와서 찍어먹으니 또 조화가 괜찮드라.

밥을 다 먹고 맥주나 한 잔 할까했다. 괜찮은 펍이 없나 검색하다가 여기다 싶은 곳을 발견, 무작정 지도를 따라 갔다.

그리고 도착했을 땐, 정말 '여기다'싶었다.



'쟁이'라는 21년 된 뮤직바. 올라가는 나무계단에는 유명한 뮤지션들의 이름이 새겨져있었고 벽에는 언제 붙여졌을지 모를 바랜 잡지조각이나 사진들이 가득했다. 스테이지도 있는 것이 주인이 원할 적에 간간이 라이브 공연도 열리는 것 같았다.



It was just PERFECT. 이보다 더 완벽한 공간이 있을 수 있었을까. 들어서자마자 코에 닿는 익숙한 향냄새가 신비롭고 흔들리는 초의 불빛이 은은한, 아름다운 곳이었다. 우연히 찾은 해변가의 진주같은 곳이었달까. 요새는 정말 우연히, 요행같이 찾아오는 즐거운 일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년의 장인 아저씨같이, 조금은 낡고 중후한 스테레오로 가볍지 않은 (종종은 다소 헤비한) 음악들을 들으며 진토닉을 마셨다. 여기 칵테일은 술 비율이 좀 센 것 같은 느낌이 있긴 했지만, That is good for me. 한참을 이곳에 취해 시간을 보내다 왔다. 이 장소로 대구 여행은 정말 정점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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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5.1

다음날이 밝았다. 약간의 숙취가 있긴했지만 심하진 않았다. 체크아웃 시간이 얼마 남지않아 급히 샤워와 화장을 하고 무작정 뛰쳐나왔다. 어제 마신 술 탓에 목이 탔고 맛있는 아이스 커피를 들이키고 싶었다. 인터넷에 꽤 유명한 커피집인, 커피명가를 찾아갔다.

당연히 길을 헤맸다. 걷다보니 그 길이 유명한 근대로(?)였다. 정말 별거 없었지만 가로수 사이로 떨어지는 햇살 무늬가 아름다웠고 가끔 불어오는 바람이 선선했다. 걸으며 얄개들 노래를 들었다. 가는 길에 허름한 돼지국밥집을 발견했다. 아점도 먹을 겸, 해장도 할 겸 무작정 들어갔다. 국밥치곤 조금 비쌌지만 맛있었다. 정말 맛있었다.



국밥 한그릇을 뚝딱 먹고 진짜 목적지였던 커피명가본점을 향했다. 역시나 길을 잃었다. 더웠지만 그늘 안에 있으면 나름 바람도 불고 선선해서 기분이 좋았다.



가는 길에 우연히 찍은 동성로의 햇빛얼룩과 기분 좋은 나.

한 20분쯤 걸었을까, 마침내 커피명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낡은 간판과 입구 계단에서부터 메뉴판, 내부 인테리어, 테이블과 소파까지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어 말그대로 빈티지의 멋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공간이었다. 심지어 점원이 주문을 테이블에서 직접 받는 방식까지 멋스럽더라.



값이 여의도의 주빈보다도 비쌌지만, 커피맛은 정말 일품이었다. 나는 콜롬비아 드립을 아이스로 마셨는데 향이 정말 신선하고 조화로왔다. 그렇게 한참을 노닥노닥 음악을 듣고 여행사진도 정리하고, 시간을 보내다가 점심을 먹기로 했다. 대구는 짬뽕맛이 좋다기에 근처 유명한 짬뽕집을 찾아가기로.



버스정류장 근처 성당의 멋스러운 간판. 대구는 세월의 멋이 조화롭게 잘 살아있는 도시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주로 생활하는 여의도, 홍대, 신촌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모양이라 대구를 여행하는 내내 볼 것이 많아 더운 날씨에도 지치는 줄 모르고 참 즐거웠다. 글을 쓰다 문득 드는 생각인데, 삶에서 시간의 멋만큼 깊은 것이 또 있을까... 아마 없을거야, 그치?